그녀만의 자리
동과 서 사이, 남과 북 사이 그중에서도 어느 방향에 더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위치점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남북 네 가지로 단순히 표시한다면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 채 혼란만 야기 될 것이다. 작가 강혜숙의 작품 세계도 그렇다. 구분 지어 나누려 하는 사람들은 디자이너냐 예술가냐 어느 쪽이냐를 묻곤 하지만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더 세밀한 시각이 필요하다. 디자인과 예술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알기 위해선....
깊고 어두운 누아르
밝은 빛이 사그라들고 밤이 되면 달의 기운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 해와는 상극이다. 밤의 시간을 영위하며 완성한 작품들은 그 시간을 닮아 어둡고 무겁다. 한껏 치켜 올라간 눈썹에 빨간 눈을 한 복면의 남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무기들, 내리누르는 시커먼 하늘, 위태롭게 서 있는 검은 망토의 사람. 그렇게 폭력과 어둠, 잘못된 욕망을 담은 조금 불편하고 불안한 작업을 한다. 형식은 약간씩 달랐지만 한 번도 딴 길로 새지 않고 어릴 적부터 지금껏 죽 그렇게 VSFORCE란 이름으로.
시간을 들이다.
누군가와 한 번에 친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별히 낯을 가리진 않지만 함께한 시간이 없으면 뭔가 내 사람 같지 않다. 오랫동안 시간을 두고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편해지고 가까워지는 관계가 좋다. 대신 한 번 인연을 맺으면 곁에 오래 두고 깊게 만난다. 작업도 그렇다. 단계 단계를 거치고 기다리며, 다듬고, 매만지고, 상상하고, 기대하고... 무른 흙이 건조되고 여러 차례 불을 만나 단단히 자기화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을 쌓으며 작업하는 게 좋다. 도자 작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기다림. 어쩔 수 없는 그 시간이 좋다. 모든 과정이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힘들지 않다. 오히려 속도를 다투는 일보다 더 잘 맞는다. 작가 백승주는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과 조금 다르게 천천히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여전히 아트 홀릭
파란색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도 똑딱똑딱 경쾌한 탁구공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마실 나온 할아버지, 지나가던 학생들, 운동이 부족한 직장인... 누구든 편하게 들어와 탁구 한 게임 즐기면 된단다. 이번엔 탁구장이지만 아마 이 삼 주 지나면 또, 변해있을 거다. 전시나 퍼포먼스 공연이 열리겠지. 그 주인공은 전문 작가 일수도 어쩌면 직장인이거나 혹은 동네 초등학생일 수도 있겠다. 예측불허에 변화의 주기도 매우 짧다. 왜냐하면 ‘예술과 사랑을 하기에 시간은 너무도 짧다’란 윌리엄 서머셋의 말을 실천하느라 강도 높은 노동 시간으로 본인의 삶을 꽉 채워 살아가는 유디렉, 유기태 대표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히
쓸만한 쇳조각 하나를 얻기 위해서도 수 없는 메질과 담금질이 기본이다. 불과 물이라는 극과 극을 번갈아 옮기고, 수없이 두드리는 고난의 시간이 있어야 공기가 빠지고 밀도가 높아지며 내구성 단단한 쇠붙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류재수 작가가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 또 그리고를 반복하며 짧게는 이삼 년, 길게는 십 년 넘게 고민의 흔적을 덧붙이며 작업하고 나서야 받아들 수 있는 ‘인내의 열매’ 책 한 권. 가치 있는 그림책 한 권을 위해 걸어온 지난하고 끈질긴 그 작업의 시간.
참! 할 만하다, 그림쟁이
언덕배기를 오르는 동안 보이는 쓰레기를 주워들고, 작업실 문을 연다. 외투를 벗어 한편에 두고 커피를 내린다. 오래된 공간이라 추위가 상당해서 얼마 전까지도 커피 내리는 동안 기름 넣고 불붙여 석유 난로를 틀었다. 한파가 엄청났던 지난겨울 너무 추울 땐, 직접 톱질해 액자를 만들며 몸에 열을 내고서야 작업할 수 있었다. 그래도 좋다. 따르는 어려움이 없진 않지만, 볕이 잘 드는 창이 있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노래가 있고, 작업 테이블도 있고 작으나마 그림을 걸 벽도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 행복하다.
이 모든 예술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개개인의 삶이 팍팍해 넓게 보지 못하고 나만 알기에 십상이다. 처음엔 그 역시 자신의 필요 때문에 시작했다는데 지금은 본인에서 주변 작가로 곧 그처럼 장사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그 후엔, 동네 전체로 이젠 아예 범 지역적인 범주로까지, 그가 관심 기울이며 관여하는 활동 영역은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이자 이유는 바로 예술. 갤러리 밖으로 나와, 예술의, 예술에 의한, 예술을 위한 ‘홍익(弘益) 활동’에 여념이 없는 아트 딜러 김남균의 무한 확장된 예술 이야기.
그림이 있는 은미씨 작업실
어쩌다 보니 우연처럼 하나둘 자리 잡은 작품들은 그때의 그녀와 맞닿아 있는 삶의 흔적들이다. 억지로 있는 척하거나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그저 눈길이 닿는 공간 곳곳에 자리하며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때론 힘든 나에게 힘주는 것 같아, 어느 땐 작가의 상황이 나와 닮은 듯해서 또 ‘그래 다 그런 거지.’라고 너무나도 고개가 끄덕여져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그녀의 품에 들어온 이젠 제법 많아진 작품들.
가시로 살기로 했다
선인장 이파리는 사막이란 극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가시가 되었단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뜨거운 햇볕, 밤에 찾아오는 추위, 부족한 수분 그리고 해를 입히는 초식동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주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뾰족한 가시가 된 것이다. 그도 그렇다. 현실이란 무게에 눌려 무뎌지고 무던해지다 결국 자신을 잃을까, 애써 날카롭게 가시가 되길 선택한 까시(ccasi)란 이름의 작가.
이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온종일 문밖 한 번 나서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어떤 날엔 길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사랑해 마지않는 조카들과 그림도 그리고, 두 녀석과 함께 할 시간을 준비하느라 며칠씩 보내기도 한다. 올빼미형인지라 작업은 보통 밤에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또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짜인 계획은 없다. 대신 매우 충실히 재미있는 일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직동 골목길을 쭉 걸어 들어가면 그런 그녀가 있다. 창이 예쁜 하얀 벽돌집에서 만난 이제 작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