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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렉은) 여전히 아트 홀릭
파란색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도 똑딱똑딱 경쾌한 탁구공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마실 나온 할아버지, 지나가던 학생들, 운동이 부족한 직장인... 누구든 편하게 들어와 탁구 한 게임 즐기면 된단다. 이번엔 탁구장이지만 아마 이 삼 주 지나면 또, 변해있을 거다. 전시나 퍼포먼스 공연이 열리겠지. 그 주인공은 전문 작가 일수도 어쩌면 직장인이거나 혹은 동네 초등학생일 수도 있겠다. 예측불허에 변화의 주기도 매우 짧다. 왜냐하면 ‘예술과 사랑을 하기에 시간은 너무도 짧다’란 윌리엄 서머셋의 말을 실천하느라 강도 높은 노동 시간으로 본인의 삶을 꽉 채워 살아가는 유디렉, 유기태 대표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실패 경험이 별로 없어 보였다. 쫄딱 망하기 좋다는 자영업이건만, 작가 생활만 하던 사람이 생전 처음 차린 술집의 매출은 꽤 쏠쏠했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문 열었던 플레이스 막 역시 모두의 걱정과 의아함을 뒤로하고 문화 불모지를 힙한 동네로 바꾸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의미 있지만 현실적인 여건 등으로 오래 유지하기 힘든 ‘신생 공간’을 지역에 녹아드는 문화 공간으로 십여 년 동안 유지해오고 있으니 일단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고 어쩌면 돈 문제 따윈 걱정 안 해도 되는 부잣집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짐작했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전시 일정으로 미뤄 보건대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많을 것 같고, 실패 경험이 적으니 자신감에 꽉 차 있겠군, 추측도 해보았다. 하지만 막상 만나본 그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술을 업으로 삼았으면 힘든 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다, 원래 힘들다, 죽겠다 궁상떨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일일이 말하진 않지만 예술을 다루는 현실적 한계와 두려움으로 매일 아침마다 슬럼프를 겪는다는 것.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랬듯 무거운 머리와 발목을 잡아끄는 그날그날의 잡념들을 지워버리고 집을 나선다고 했다. 그리곤 벌써 10년째, 19시간씩 이어지는 노동시간을 버텨내고 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좀 더 잘하고 싶고, 마냥 예술이 좋아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운 좋다는 오해 뒤엔 이런 시간의 누적이 있었던 게다. 다시 태어나도 예술을 선택할 것이라는 중증의 예술 중독의 발언도 서슴지 않던, 플레이스 막의 아트 딜러 유기태. 그를 행동하게 하고, 꿈꾸게 하고, 견디게 하고,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중심이자 사랑의 대상, 예술이 궁금해졌다.
장소를 잘못 찾아왔나 했다, 웬 탁구댄가?
2010년부터 환경과 사람의 관계를 보다 지속 가능하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플레이스 막, 비오트프, 프로젝트의 합성어인 ‘막비오젝트(MAK+BIO+JECT)’란 이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는데 이 탁구대는 2017년 ‘막비오젝트’를 위해 준비한 거다. 이번엔 좀 더 쉽고, 가볍게 가보자 싶어 빙 돌리지 않고, 건강한 삶의 시작은 운동이란 심플한 메시지를 담아 ‘탁구게임인 막’이란 타이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참가비 대신 작품을 보내야 하는데, 조건은 단 하나, 우체국 규격봉투에 담아 제출할 것. 그렇게 해서 모인 작품들을 모두 전시하다,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탁구 경기의 결과에 따라, 지면 바로 작품 아웃! 전시장에서 철수하는 게 룰이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2018년 플레이스 막에서 한 달 동안 전시할 수 있는 부상을 수여한다.
참가를 원하는 꼬마들도 꽤 있나 보다, 벽면에 아이들 그림과 더불어 좀 더 프로 색이 느껴지는 작품들까지 다양하다.
우리야 뭐 원래 누구나 환영이라... 초등학생, 대학생, 전문작가분들까지 다양한 분들이 작품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규격봉투에 담으란 것 외엔 모두 자윤데 생각보다 아주 재밌는 작품은 많이 없는 것 같아 좀 아쉽다. 딱 규격봉투 사이즈에 맞춰 작업한 것들이 대부분이더라. usb에 영상을 담아 규격봉투에 넣어줘도 되고 보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면 했는데...
플레이스 막은 원래 제한 두는 걸 싫어하는 것 같더라.
맞다. 플레이스 막의 가장 큰 특징은 뭐든 다 가능하다는 거다. 이래야 한다는 어떤 규칙도, 선호하는 특정 취향도 없다. 전시 작품 역시 회화는 물론 설치, 조각, 퍼포먼스, 미디어 등 장르와 작가를 막론한 모든 예술 장르를 선보인다. 공간을 찾는 분들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만이 즐기는 제한적 공간이 아니라, 누구든 문턱은 쉽게 넘어 드나들고 즐기는 공간이길 원한다.
플레이스 막이란 이름이 무슨 뜻인가?
막을 걷어낸다의 막이나, 지금 방금의 막으로도 해석하시는데 그냥 마구, 막하다 할 때 막이다. 아는 분이 청바지 사업한다길래 만들어준 이름인데 안 쓰더라. 갤러리를 오픈하려고 할 때, 그 공간이 마구 쓰이고, 무엇인가 막 펼쳐진 곳이면 좋겠다 싶어 가져다 썼다.
갤러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미술 전공 후, 졸업하자마자 전업 작가 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똑같은 작가, 작품들만 나열되더라. 전시장엔 예술을 전공한 동인들뿐이고... 늘 그게 답답했다. 외국서 지내다 다시 돌아왔는데 안타깝게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공간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줄 곳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싶어 기존의 무기력과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을 보다 다양한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전시공간을 생각하게 됐다. 처음부터 갤러리 형태는 아니었고 홍대 인근에서 갤러리 술집 개념의 ‘바닥’을 열고 경제력을 갖춘 뒤에야 원하던 공간 플레이스 막을 제대로 오픈할 수 있었다.
홍대 앞에 있던 바닥을 시작으로, 토끼나, 지금의 레이저까지 술집과 갤러리 운영을 함께 이어가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궁상떨고 싶지 않고, 지치고 싶지 않아서다. 더 나은 미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픈데 자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넋두리만 이어진다. 현실적으로도 돈이 없이 없으면 운영 자체가 안되는 거고. 플레이스 막의 운영비 마련을 위한 자구책이 바로 술집이다. 바닥도 토끼 바도 정말 순수입이 꽤 됐다. 그런데 그렇게 돈 잘 버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또 이 지옥으로 들어가는구나’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세속적인 생각으로 갈등할 때 그때 그 기분을 떠올리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고민한다. 그리고 운영비가 어느 정도 마련됐다 싶으면 가차 없이 정리해버린다. 내 주업은 플레이스 막이니까.
원하는 바대로 전혀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인다. 10년 동안 꾸준히 이렇게 많은 전시를 선보이다니.
작가는 아주 많다. 게다가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도 매년 새롭게 늘어나고. 그런데 전시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작가들은 늘 굶주려 있는 상태다. 제대로 전시조차 못 해보고 그만두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래서 나만큼이라도 부지런히 공간을 사용하고 다양한 작가들을 소개하려고 애쓰고 있다. 일반 갤러리들은 보통 한 해 동안 8번 정도, 많아야 12번인데 그래야 겨우 12팀밖에 전시 못 하지 않나. 플레이스 막은 일 년 동안 스무 번 정도 전시를 소개하고 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나?
다시 태어나도 예술을 할 거다. 이 지구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게 예술이고, 그 매력이 나에게 긍정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물질적인 풍요를 버릴 정도로 행복하게도 해주고. 그리고 정말로 예술의 힘을 믿는다. 예술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했던 많은 전시 중 기억 남는 것 소개해달라.
플레이스 막에서 했던 모든 전시는 모마(MOMA) 이상급이라 생각하고 공을 들인다. 그래서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고 감사했던 순간을 꼽자면 제1세대 전위 예술가로 손꼽히는 김구림 작가님 전시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하시고 난 후, 바로 다음이 우리와의 전시였다. 이름 없는 작고 누추한 갤러리가 아니라 단단하고 강한 알맹이가 있는 공간으로 인정받은 것 같았고, 그때까지의 노력들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지금껏 함께해 준 다른 작가분들에게도 프라이드를 높일 수 있게 해드렸던 것 같아 행복했다. 플레이스 막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줬던 전시라 그런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아트 딜러로서의 본인은 어떤 모습인가?
아마 고민하는 모습이 대부분일 거고 그 후엔 펼쳐놓고 기다리는 편이다. 우선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가치화시켰을 때 얼마나 자본화할 수 있는지 오래 고민하고 작가와 의논한다. 작가들은 도인도, 자선사업가도 아닌 미술을 업으로 하는 사회인이니만큼 그들의 노동시간을(육체적 노동시간과 정신적 사유, 사고의 시간 모두)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합리적 가격을 책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무형의 가치를 나의 언어로 설득해서 소유하고픈 감정까지 끌고 가는 건 매우 어렵고, 아직도 익숙지 않지만 작품의 힘을 믿는 편이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작품 그대로를 잘 느낄 수 있도록만 돕는 편인 것 같다.
전시품 완판 기록은 물론 아트 페어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둔 걸로 아는데…
운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이 좋았다. 두 번 다 조문기 작가의 작품들이었는데 전시 땐 판매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싶어 일 년 전부터 부담 없는 주제와 사이즈, 가격이란 조건을 고려해 작정하고 계획했고, 그 반대로 아트 페어 때는 하지 말라는 걸 다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그것도 80호 120호 이렇게 큰 것들로 준비해 나갔는데 페이퍼 정크 만들고 싶지 않아 명함과 작품 소개 담은 아이패드 두 개만 스탠딩 테이블 위에 놓아뒀었다. 관객이 알아서 하게끔 그냥 뒀는데 성과가 좋아 다행이었지.
좋은 아트 딜러로서의 요건은 뭐라고 생각하나?
예술을 사랑하는 숭고한 마음을 갖추면 좋을 것 같다. 다소 이질적이지만 숭고한 맘이 있을 때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작품에 대한 가치와 신념이 자신 안에 구체화되며 말에 힘이 생기고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련된 방식이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