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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은미씨 작업실
어쩌다 보니 우연처럼 하나둘 자리 잡은 작품들은 그때의 그녀와 맞닿아 있는 삶의 흔적들이다. 억지로 있는 척하거나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그저 눈길이 닿는 공간 곳곳에 자리하며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때론 힘든 나에게 힘주는 것 같아, 어느 땐 작가의 상황이 나와 닮은 듯해서 또 ‘그래 다 그런 거지.’라고 너무나도 고개가 끄덕여져서 등의 다양한 이유로 그녀의 품에 들어온 이젠 제법 많아진 작품들. 대단한 컬렉션 방향이나 꿈 대신 오롯한 그녀가 느껴져 더 반가웠던 소소하고 담백한 해방촌 작업실의 생활 속 ‘예술’ 이야기.
여전히 꽤 많은 이들이 ‘그림을 산다는 건’ 투자 가치 따위를 고민하는 특정 부유층만의 고상한 취미라 생각한다. 누구누구의 작품이 헉 소리 나게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는 뉴스, 알만한 사모님이 차린 갤러리, 판화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스럽기만 한 그림 값, 그림은 입장료 내고 보는 정도나 렌탈 정도면 모를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물론 휴대전화 회사 인사팀에서 근무하며 번 돈을 아끼고 아껴 가며 그림을 사고, 결국 세계적인 아트 컬렉터가 된 ‘월급쟁이, 컬렉터 되다’의 작가 다이스케 미야츠나 그가 책에서 언급한 보겔 부부처럼-남편은 우체부, 부인은 시립 도서관 근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아트 컬렉터가 된 예는 있었지만, 그저 입지전적 인물이겠거니 생각하고 먼 나라 이야기쯤으로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패브릭 디자이너 강은미의 작업실을 다녀오며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관심 있는 누구라도 원화를 소유하고 내 공간 안에서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컬렉팅을 시작하게 되었나?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다. 크고 유명한 전시 정도만 주말에 짬을 내 찾아가는 호기심 많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십여 년 전 잡지를 통해 찾아갔던 작은 전시 공간에서 소통하기 좋아하는 딜러를 알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콧대 높고 문턱 높은 갤러리가 아니라 오랜 친구네 집처럼 편안한 작은 공간에서 본 신진작가들의 작품은 더 가까이 와 닿았고, 괜한 주눅 들지 않아도 돼 좋았다. 또 ‘그림계’를 들어 목돈 들이지 않고 쓸데없는 데 낭비할 수도 있던 비용을 보다 가치 있게 소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림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하루 1,000원씩 모아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산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게 바로 ‘그림계’다. 커피 한 잔보다 적은 비용만 매일 모아도 누구나 그림을 소유할 수 있으니 매력적이지 않나. 또 그 안에서 취향 비슷하고 마음 맞는 주변의 컬렉터들을 알게 되며 같은 관심사를 나누고 엄청난 목돈 들이지 않고도 그림을 살 수 있게 되면서 점점 더 깊이 컬렉터의 세계에 발 들이게 되었다.
그림을 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먼저 전시를 보고 모자란 2%는 딜러를 통해 이야기를 듣는다. 때론 작가분과 직접 이야기 나누며 메우기도 하고 이게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사는 가장 큰 매력이 될 수도 있겠다. 작가가 느끼는 어떤 지점과 내가 느끼는 것이 만나는 접점 같은 것도 생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내 것이 되었으면 바라게 되는 작품들이 자연스레 생기더라.
그런 작품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나?
즉흥적이기보다 신중히 하는 편이다. 전시 초반 가보고 맘에 들면 끝나기 전에 다시 찾기도 하고 또 나중에 딜러에게 문의해 따로 사기도 한다. 소모품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지도 않고,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만큼 오래도록 곁에 두고 질리지 않게 지니고 있고 싶고, 진짜 나만의 컬렉션이 될 수 있도록 선별하기 원해서다. 대신 부담 없는 가격에 작가의 의도와 감성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엽서나 수건 등의 아트 상품은 구매해 마치 작품처럼 곳곳에 비치해 두고 보는 편이다.
작품을 살 때 어떤 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처음 그림을 샀을 때는 디자인 작업을 계속해온 특성상 작품 자체의 비주얼 적인 면과 공간에서의 어우러짐 등 보이는 면에 중점을 두고 봤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외적 요소보다는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그때의 내 상태와 마음이 작품 선택에 제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작품 안엔 곧 그 시간 속의 내가 담기게 되었고 시간이 누적되고 작품 수도 늘어나면서 트렌드와 전혀 상관없는 오직 나만의 컬렉션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되면 한 공간 속에서 각기 다른 작품들이 비주얼 적으로 서로 충돌하지는 않는지?
‘나란 존재의 필터링’을 거친 만큼 각기 다른 느낌, 다른 색채의 작품인데도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보다 그들끼리 이질감 없이 잘 어우러진다.
그림 가격 물어보면 실례인가?
지금까지 모은 16점의 작품은 모두 신진 작가들의 것으로 보통 100만 원 미만으로 샀는데, 30~40만 원대 작품이 가장 많고 좋은 기회에 그보다 저렴하게 산 것도 몇 점 된다. 예술 작품을 앞에 두고 가성비 운운하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현관에서 작업실로 가는 통로 벽면을 거의 메우다시피 한 강렬한 색감의 초상화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무섭다’와 ‘기괴하다’, ‘멋지다’, ‘색감 좋다’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인데 반응과 상관없이 막상 구매 비용을 들으면 누구나 잘 샀다고 한다. 윤세나 작가가 순수 미술을 그만두고 패션 쪽으로 전향하려던 시점에 산 거라 압도되는 크기에 비해 매우 저렴하게 살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고밖에.
좋아하는 작가와 애정이 가는 작품에 관해 이야기해달라.
유독 관심이 가는 아티스트는 김정선이다. 그녀의 작품은 이미 5점 정도 소유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궁금해지고 보고 있으면 또 반하게 된다. 또래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유쾌하게 드러내 보이는 당당함이 좋다. 게다가 뻔하고 일상적인 재료들이 새롭게 형상화되는 오브제 작품들이 주는 빈티지한 감성과 의외성이 재밌다. 아기자기한 손재주가 없는 나와 전혀 다른 손맛 나는 소소한 모습에 끌리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나 애정이 가는 작품은 아이스 스케이트를 오브제로 사용해 귀를 형상화한 작품. 양쪽 귀가 잘 안 들리는 대신 그녀에게 엉뚱한 상상력을 선물해 주셨나 보다.
아티스트 최수진의 아트 상품이었던 하얀 수건도 수놓아진 파란색 문장 ‘어디로 갈지 모를 땐 모르는 길로 가자고’라는 문장이 좋아 다른 작품과 차별하지 않고 펼쳐놓았다. 또 현관 수납장 위에 붙여진 자그마한 색색의 여섯 개 프레임 모두 하나의 작품인데 손 가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배열할 수 있는 마그네틱이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색색의 프레임 안에 날짜가 적힌 압정들이 담겨 있는 데 무심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또 받기도 하는 우리의 다친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컬렉터로서의 향후 계획이 있나?
컬렉터라 불리는 것도 좀 민망한데 처음부터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대단한 목표나 지향점 같은 건 없다. 그때의 내 상태, 그 찰나의 나와 어울리고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라면 또 눈길이 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