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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온종일 문밖 한 번 나서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어떤 날엔 길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사랑해 마지않는 조카들과 그림도 그리고, 두 녀석과 함께 할 시간을 준비하느라 며칠씩 보내기도 한다. 올빼미형인지라 작업은 보통 밤에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또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짜인 계획은 없다. 대신 매우 충실히 재미있는 일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직동 골목길을 쭉 걸어 들어가면 그런 그녀가 있다. 창이 예쁜 하얀 벽돌집에서 만난 이제 작가가…
처음 그녀는 인문계 대학생이었다. 그러다 더 하고픈 걸 찾아 디자인과 학생이 되었다. 전공에 맞춰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고 꽤 오랫동안 창의성 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의도 파악이 더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한계도 느껴졌다. 이건 아니다 싶어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 셀러리 우먼으로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제’라는 이름의 작가가 되었다. 하던 것을 멈추고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것. 어지간한 용기가 없으면 하기 힘든 그 일을 그녀는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씩이나 해냈다. 어쩌면 차분한 인상에 천상 모범생 같은 그녀의 겉모습 뒤엔 엄청난 자유 의지와 열정을 지닌 거인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건 끝내 하고야 마는 꿋꿋하고 강단 있는 그녀는 함께 퇴사한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복직한 지금도 홀로 판 공작소를 운영하며 목판화와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하고 때론 독립출판물도 만들고, 작은 전시도 하고, 계절 좋을 땐 세종예술시장 ‘소소 마켓’도 참여하며 전업 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다. 본인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하루하루 발자국을 찍으며 느리더라도 온전한 그녀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름이 독특하다
‘이제 다시 시작이야.’, ‘이제 늦잠자지 말아야지.’ 할 때 쓰이는 한글 부사 이제다. 본명은 아니고, 뭐 대단한 의미도 없다. 천리안 시대 때 통신 아이디로 쓰던 건데, 그 이름도 날 나타내는 것이었으니까 또 쓰기도 부르기도 쉬워 그대로 이어 사용하고 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시점이 달라지는 단어가 주는 전환되는 느낌이 좋아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떻게 해서 작가가 되었나?
2012년 초까지 디자인 회사에 다녔다. 말은 디자인 회사인데 업무를 보면 기존 디자인을 개선해주는 리서치 회사에 가까웠다. 디자인 작업에 컴퓨터가 막 도입되던 변화의 시기이기도 해서 종일 모니터 앞에서 목적이 뚜렷한 디자인 작업만 해댔다. 그나마도 전체 과정 중 내가 하는 건 중간 어디 한 토막이고 의견이 달라 꼬이기도 하고, 나 하나 잘해도 결과물이 꼭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한계가 느껴졌다. 그러던 때, 취미로 목판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기가 없었는지 원래 수강하던 수업이 폐강되었는데 계속하고 싶더라. 어찌할까 하다 강의하시던 선생님께 개인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점점 제대로 하고 싶어지는 거다. 그래 내가 재밌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 싶어 아예 퇴사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많은 장르 중 왜 판화인가?
판화를 배우게 된 것도 판화 대전 전시에서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였다. 직접 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내 손으로 나 혼자 완성해내는 느낌이 좋더라. 원래 하던 일과는 반대 지점에 있는 아날로그적 수공 느낌도 좋고, 몰입할 수 있는 조용한 노동의 시간과 나무가 주는 질감도 좋다.
작업하는 과정을 설명해달라
목판화는 어린 시절 한 번쯤 해봤던 고무 판화 작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거다. 다색 작업이나 소멸 기법 등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최대한 너무 복잡하지 않게 단순히 작업하려 한다. 찍었던 사진을 보기도 하고 머릿속에 남는 어떤 단어나 이미지 등을 떠올리기도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며 생각을 모은 다음,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전사해 판에 그림을 옮긴다. 작업 칼로 파내고 중간중간 생각한 대로 나오는지 프레스기를 이용해 찍어보고 수정한다. 파면서 생각했던 것과 실제 프린트했을 때 보는 거랑은 또 달라서 파고 찍고 수정하고를 여러 번 반복하는 편. 잘 나올 것 같은데 막상 찍으면 별로일 때도, 생각보다 결과가 그럴싸할 때도 있으니 일단 찍어보는 게 먼저다. 그리고 원하는 컬러를 얻는데도 시간을 들인다. 기본 원색 잉크를 서로 배합해가며 색을 만들고, 또 이렇게 저렇게 컬러를 달리해 찍어보며 느낌 맞는 것을 찾기도 한다. 실크 스크린 작업도 많이 하는데 집 공사를 하고 남은 목재로 직접 틀을 만들어 쓴다. 산책하며 모아온 나뭇잎들과 주변 식물들을 감광해 ‘자연의 위로’란 시리즈물을 만들고 있다.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얻는다. 산책길에서 본 것들 여행 갔을 때의 사진, 고양이, 창밖의 풍경, 우리 조카들.
조카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조카 바보다. 쌍둥이 조카들이 그린 그림에 감탄하고 열광하는 조카 바보 미혼 고모. 판 공작소 이름으로 독립 출판한 그림책도 조카들을 위해 탄생했던 거고, 누구나 직접 마음대로 꾸미며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볼 수 있는 판 공작소 미니 북도 결국은 조카들과의 시간을 고민하다 만들게 되었다. 어린이날 선물로 기획한 모빌은 시간도 공도 너무 많이 들여가며 고생고생해 완성하다 오히려 제날짜에 맞춰 주지도 못했었다.
앞에서 언급한 판 공작소는 뭔가?
이 작업실 자체가 ‘판 공작소’고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물과 강좌 모두 판 공작소란 이름으로 판매되고 진행된다. ‘이제’가 작가 이름이라면 ‘판 공작소’는 브랜드명이라고 나 할까. 그림책 ‘너는 무슨 색 괴물이야?’, 판화표지 안에 음원을 받을 수 있는 코드가 담긴 ‘I am somebody' 북클릿, 엽서, 작은 도자기 소품 등에 판 공작소 이름을 붙여낸다.
어렵겠지만 애착 갖는 작품 소개해달라.
퇴사 후 네팔에 갔었다. 그곳에서 네팔 안나푸르나 지역을 트레킹했는데 그때의 기억을 담아 작업한 단색 판화 ‘from the basecamp’가 애착이 간다. 내 앞에 놓일지도 모를 위기와 어려움 등을 잘 극복해내고 싶던 그때의 마음이 느껴진다. 또 하나는 소멸법으로 작업했던 다색화 ‘불면증’. 소멸법은 하나의 판에 이미지를 새긴 뒤, 파내고 찍고 또 그 판을 더 깎아내어 앞에 찍어둔 종이 위에 덧찍는 것을 반복하는 판화 법이다. 결국, 여러 번의 작업을 통해 단이 판이 말 그대로 소멸, 없어지게 되면서 보통 판화와 달리 처음 작업할 때 인쇄한 매수 외에는 추가로 찍어내기가 불가능하다. ‘불면증’ 역시 딱 다섯 장의 에디션만 제작해놓았는데 한정된 작품이라 그런지 더 애틋하다.
당신의 작품을 구매하는 컬렉터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 적 있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취향이나 관심, 생각이 비슷한 분들이 아닐까?
작가로서 원하는 바가 있다면?
큰 욕심은 없다. 캐주얼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의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 좀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작가가 누군지 몰라도 ‘아! 이 작품 너무 좋다.’ 생각될 때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는 그런 느낌이 전달할 수 있으면 너무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