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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만의 자리
동과 서 사이, 남과 북 사이 그중에서도 어느 방향에 더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위치점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남북 네 가지로 단순히 표시한다면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 채 혼란만 야기 될 것이다. 작가 강혜숙의 작품 세계도 그렇다. 구분 지어 나누려 하는 사람들은 디자이너냐 예술가냐 어느 쪽이냐를 묻곤 하지만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더 세밀한 시각이 필요하다. 디자인과 예술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알기 위해선....
그녀는 A형이다. 혈액형으로 타입을 운운하긴 그렇지만 남의 말 흘려듣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기 잘하고, 꼼꼼하고, 배려심 넘치는 흔히들 생각하는 전형적인 A형 성격을 가졌다. 이런 성격은 그림을 대하는 데에도 그대로 배어있다. ‘내가 좋아 그렸으니 누가 좋아하든 말든’이 잘 안된다. ‘내 그림이 어디에 가더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며 마음이 쓰이고, 아마추어가 아닌 이상 그림 가격을 적정선 이상으로 올리라는 말에도 살 사람의 주머니 사정이 걱정된다. 내 그림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도 고민하게 되고. 이런 그녀를 두고 예술은 누군가를 자극하는 것이고 디자인은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외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만 예술가는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한다며 정체성에 대해 공격하기도 한다. 날 선 질문들과 이런저런 평가에 시달리다 보니 그녀 자신도 조금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 것도 사실. 한 장의 아트워크가 유일한 하나로 남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때도 그렇고, 예술가는 타협이 안 되고 디자이너는 협업을 잘한다는데 난 왜 다른 이들과 마찰 없이 일을 잘하나? 생각될 때도 그렇다. 아트 워크와 그림책 작업을 동시에 하다 보니 그런가? 순수 미술이 아닌 디자인에 시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인가?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앞으론 조금 덜 고민하기로 했다. 디자이너든 예술가든 무엇으로 불리든지 상관없이 이 일을 계속할 거니까. 대신 그녀 안에 하고픈 많은 이야기와 창작 과정의 즐거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고 좀 더 노력하려 한다. 또 다른 꽃을 피울 그 순간을 위해.
그림처럼 작업실도 온갖 컬러로 알록달록할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컬러가 많진 않다.
모든 컬러를 사랑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작업실이 집에 있다 보니 남편이 질색하더라. 가장 큰 안방을 작업실로 내어준 대신 색만은 좀 제한을 두자 해서 맞추고 있다. 원래도 그렇긴 했지만, 그 욕구불만을 책 속에서 해결하니 책 안의 색이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나?
전혀.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데생이나 드로잉 같은 미술 교육도 전혀 받아본 적 없다. 고등학교 때 이과에 진학해서 수학 공부 열심히 하다 대학엘 갔다. 전공 이름은 제품 디자인이지만(현재는 디자인공학과로 바뀜) 미술 실기 전혀 없이 수능만으로 입학하는 공대였다. 그래서 그림을 못 그린다. 특히나 보이는 걸 똑같이 그려내야 하는 건 정말 못 한다. 비율도 못 맞추겠고. 그림이 왜 그러냐, 원근감도 없다, 소묘감도 없다 뒤에서 얘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 대상의 워크숍에 갔는데 한 아이가 나에게 와 대뜸 ‘그림 왜 이렇게 못 그려요? 제가 더 잘 그리는 거 같아요. 그런데 재밌어요. 못 그리긴 하지만.... 뭐, 괜찮아요.’라고 말하더라. 그런데 그 말이 정말 큰 위로가 됐다. 다시 미대에 가야 하나? 어디 가서 소묘 좀 배워볼까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냥 못 그리는 채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리얼리티나 스킬의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그럼 어떻게 그림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건가?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웹 디자인 열풍이 일지 않았나. 나도 컴퓨터 학원 다니며 배운 거로 작은 회사의 웹 책임자로 입사하게 됐다. 교육용 콘텐츠와 플래시를 만들며 사 년을 보내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생겨 디지털콘텐츠디자인과 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 학교 다니며 애니메이션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공모전이 있다고 해서 준비 중이던 이야기를 네 컷의 일러스트에 담아 출품했다. 스토리보드처럼 만들었던 그 작품이 운 좋게도 한국 안데르센 그림자상 출판미술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제작 전, 그림책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고, 다행히 뜻 맞는 곳을 만나 출판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책이 ‘꼬리야? 꼬리야!’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됐다.
그림책 작가로의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첫 책을 시작으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괴물’ ‘수레를 탄 해’ ‘쵸가 말한다’ ‘크리스마스 1 2 3’ ‘오냐 나무’ 와 ‘별세계’ 등 꽤 많은 그림책을 만들었다. 데뷔작인 ‘꼬리야? 꼬리야!’로 제네바 어린이가 주는 최우수 그림 상인 ‘Prix p'tits momes'와 프랑스 북부 지역 도서관이 수여하는 ’Prix nord lsere' 상도 받고. 다른 나라에서 내 책이 출판되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판이 기억난다. 할아버지 편집자가 이야기의 분위기와 캐릭터를 많이 바꿔 놓으셨는데 그게 전혀 불쾌하지 않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좋았다. 판매도 꽤 많이 됐었고. ‘수레를 탄 해’는 일본 소니 뮤직에 의해 13부작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서 일본의 공중파 티브이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러 그랬는지, 계약서를 꼼꼼히 체크해 보지 못해 개인 전시에서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 어떤 곳에서도 상영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세계의 그림책이란 프로젝트로 5개국의 책을 한 권씩 선정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거였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걸로 안다.
꾸준히 출판해 온 비결은 뭔가?
출판사 찾아가 설득하는 일을 잘한다.(웃음) 내 기획에 덧붙인 요구 사항이 있으면 그것도 참고해 넣어보려고도 하고 다른 아이디어를 더하자고 했을 때 자존심 상해하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더 나은 방향이 있으면 그걸 따른다. 그런데 진짜 근본적인 비결이자 원동력은 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것. 그림책 한 권도 안 봤던 내가 이렇게 된 게 신기하지만 오래 하고 싶고, 진짜 재밌는 이야기로 잘 만들어보고 싶다. 그래서 고민도 있다. 주제가 어렵진 않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 작가들의 그림책까지 열심히 찾아보고 워크숍에서 만난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직접 보면서 접점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언젠가 꼭, 제대로 된 장편 그림책을 만들어보고 싶다.
도구는 무엇을 사용하나?
로트링 펜만 있으면 된다. 제도용 로트링 펜으로 가장 얇은 선을 그려 이미지도 만들고 그 안에 다양한 패턴도 그린다. 빈 구석이 남는 걸 잘 못 보는 스타일이라 갖가지 문양과 선들을 여백 없이 꽉꽉 채워 넣는다. 그 후 채색 작업은 디지털로 하므로 컴퓨터와 스캐너, 액정 태블릿을 사용한다. 밑그림을 스캔한 후,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컬러들로 작은 면면까지 모두 색을 입힌다.
개인 작업은 어떻게 다른가?
나의 경우, 그림은 무언가 바라는 것을 그리는 거로 생각한다. 선사시대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개인 작업으로 그리는 만다라와 부적 시리즈 모두 이 지점에 맞닿아있다. 크고 작은 소망의 상징과 좋아하는 것 등 여러 이미지를 만다라 속에 넣으면, 오만가지가 패턴과 이미지가 모여서 하나의 원형을 이룬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문양은 물론 고양이도 그리고, 찻길과 자동차도 그리고 음식도 그려 넣는다. 어떤 소재든 다 녹아들 수 있는 틀이 만다라다. 세밀하고 오묘한 시각적 느낌과 특유의 조형미도 너무 좋고. 컴퍼스로 기본 원형을 그리고 작도하기 시작하면 그저 행복하다. 채워나가는 그 재미에 만다라를 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친한 친구조차 불교 그림이라 말할 정도니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제한적으로 와닿을까 싶어 좋아하는 만큼 마음껏 그리지를 못했다. 복을 담은 글귀나 모토 등을 써넣은 보다 직접적인 ‘바라는 그림’ 부적 시리즈도 그리는데 이러다 보니 정말 불교 신자로 오해받곤 하지만 실은 크리스천이다. 좋아하는 원시미가 불교에 담겨 있어 그 형식을 따라 쓰는 거지 내 그림은 종교적 색채와는 전혀 무관하다.
아트 워크 작업할 때 어려운 점은 뭔가?
그림책에 익숙해져 있어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 하는 회화 작업을 할 때 종종 혼란스럽다. 그림이 카피되어 대량생산되는 걸 자주 봐와서 한 장의 그림으로만 남는 게 아깝기도 하고, 그 한 장을 위해서만 온 힘을 쓰는 게 뭔지 모르게 아쉽고, 어색하다. 내 뿌리가 디자인에 있기 때문일까? 고민될 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이다.
그림 그리는 시간 외 당신의 모습이 궁금하다.
남의 책을 본다. 그림책도 보지만 그 외의 다양한 책에 관심이 많다. 각양각색의 문양 책, 옛날이야기, 일본에서 출판된 미술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의 이론서들, 사진집 등등.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는 것도 좋아하는 일상 중 하나. 그곳에 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여러 번 본 건데도 볼 때마다 새롭고. 전생에 내가 벽화를 그렸을 것만 같은 상상에도 젖는다. 최근에는 민화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민화가 선 중심 미술인 데다 내가 그리는 부적이나 만다라 시리즈처럼 바라는 온갖 욕망이 상징화되어 담겨 있어 각각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문제는 붓질이 안 된다는 것. 펜 드로잉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줘 그려야 하지만붓은 손에 힘을 빼야 하는 데 힘주는 데에 익숙해져 있어 그걸 고치는 게 참 어렵다. 오늘도 선생님의 실망 섞인 말씀을 듣고 오는 길이다.
최근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키르기스스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한 문화교류 프로그램 ‘아시아 스토리 워크숍’을 통해 중앙아시아 5개국 글 작가와 한국의 그림 작가 다섯 명이 1 대 1로 팀이 되어 한 권의 그림책을 제작하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실크로드 관련된 책을 만들어 보고 싶어 공모해 얻은 기횐데 글 작가를 만나러 직접 키르기스스탄에 방문하곤 그 나라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먼지 하나 없는 그곳의 하늘, 전통 문양이 가득한 카펫, 흙집, 나와 너무도 닮은 그곳의 사람들. 직항 편이 없어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 어느 여행지보다 좋았다.
‘열심히 노력해서 재능을 꽃피우자!’는 모토가 블로그에도 홈피에도 사인에도 들어있더라.
늘 나는 그림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하고 싶은 일이니까 기회가 오든 오지 않든 꾸준히 노력은 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어느 날 정말 꽃이 한 송이 피더라. 누구에게나 싹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꽃은 모두에게서 다 피는 건 아니니,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한다고 좌절하기보다 노력해보길. 그럼 언젠가 꼭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거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힘쓰라는 직접적이고, 노동집약적 말이라 오히려 편하지 않나? 원래 작고하신 박이소 작가님 스케치북에 빽빽하게 쓰여 있던 글이었는데 마음에 와닿아, 나의 모토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