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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히
쓸만한 쇳조각 하나를 얻기 위해서도 수 없는 메질과 담금질이 기본이다. 불과 물이라는 극과 극을 번갈아 옮기고, 수없이 두드리는 고난의 시간이 있어야 공기가 빠지고 밀도가 높아지며 내구성 단단한 쇠붙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류재수 작가가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 또 그리고를 반복하며 짧게는 이삼 년, 길게는 십 년 넘게 고민의 흔적을 덧붙이며 작업하고 나서야 받아들 수 있는 ‘인내의 열매’ 책 한 권. 가치 있는 그림책 한 권을 위해 걸어온 지난하고 끈질긴 그 작업의 시간.
까만 뿔테 안경 너머 장난기 어린 두 눈을 반짝이다가도 금세 날카롭고, 깐깐한 눈빛으로 묵직한 사회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작가 류재수에겐 순수한 아이, 정의감 넘치는 청년, 인생을 아는 낭만파 중년 아저씨가 공존한다. 그런 까닭에 그 안에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그가, 농담하다가도 곧 진지해지는 그가, 때론 감성적이고 또 때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다양한 색채의 그가 있다. 하지만 딱 하나 어떤 모습의 그이건 관계없이 변치 않는 한 가지 특징은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 매번 이어지는 어떤 문제나 선택의 순간 앞에서 주춤거리거나 노(No)하기보다는 ‘내가 한번 해보자’며 뛰어드는 쪽을 선택했다. 빈민층 아동을 위해 친구들과 탁아 운동을 함께하고, 입시 위주의 낙후된 미술 수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안 미술 교육을 시도하고, 어린이 어깨동무의 일원이 되어 남북 어린이 문화 교류에 힘쓰고. 그림책의 가치를 알리고 좋은 출판물을 소개하기 위해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전국 곳곳으로 강의를 다니고 글을 써 기고도 하고. 뜻이 좋으면 삽화 작업이라고 마다하지 않고 공들여 작업하며, 그림책 만들기 위해 사할린으로 또 중앙아시아로 떠나 그리움도 그리고, 희망도 그리며 그가 할 수 있는 걸 해왔다. 지금껏 지치지 않고 행동하도록 이끌어준 그 뜨거운 심장에, 우직한 그 발걸음에, 못 본 척 넘기지 않고 같이 안타까워하고 고민해가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팔 걷어붙이고 애써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무엇이 당신을 그림의 세계로 인도했나?
집 안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는 동양화를 좋아하셔서 직접 그림도 그리시고 김기창, 이응노, 허백련 선생 같은 당대 화가분들과 교류도 하시고 후원도 해주셨다. 그래서 자연스레 집에 찾아오시는 화가분들을 보고 자랐다. 약주 한잔하시고 그림 그리시던 모습도 종종 봤고. 그림이 낯설지 않은 환경이었던 건 확실하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딸 셋 아들 다섯의 팔 남매 중 형님 둘에 나까지 셋이 미대에 들어갔다. 아버지 옆에서 먹도 갈고, 형님들 그림 보며 ‘난 왜 재주가 없나….’하고 쫄려지내며 만날 만화만 그리던 막내아들이 바로 나다.
그림책 작가의 길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건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대 앞에 입시미술 하는 화실을 차려 아이들도 가르치고 파인 아트 한답시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소개로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돌보는 ‘해송 보육학교’에 미술 교사를 맡게 되었고 그 뒤 ‘해송 아기둥지’란 이름으로 바뀌고 나서도 그곳에서 간판도 그리고 벽화도 그리고 아이들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자세히 보니, 어린이 그림책의 수준이 한심한 정도를 넘어 위험한 지경이더라. 그림이 너무나 조악했다. ‘미대 나오고, 그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뭐 하고 있나?’ 욕하기 바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미대 나와 그림 하는 놈이거든. ‘욕하는 나도 똑같구나. 그렇다면 내가 하자!’ 싶었다. 그렇게 해송을 통해 어린이 문화의 현실을 알게 됐고 해야 할 일을 찾게 됐다.
그 후 과정은 어땠나?
화실을 정리하고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당장 수입원이 없으니 생업으로 미술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니 미술 교육 또한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더라. 먼저 미술실을 개방하고 좋은 그림책을 모아 보여주고 짜장면 사줘가며 아이들 마음을 샀다. 그리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라고 했다. 그게 전부였는데 글도 덧붙여가며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 껄 만들어내더라.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나 싶어, 객관적 검증을 받으러 안정언 교수를 찾았고 ‘좋다,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다’는 말에 힘입어 계속하게 됐다. 나중엔 교내 전시도 하고, 동덕미술관에서 ‘내가 만든 그림책’이란 이름으로 전시도 하게 됐고. 그런데 이런 전시도 하기 전, 그러니까 교수님을 만난 바로 다음 해에 갑자기 연락이 온 거다.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센터가 주최하는 ‘아시아 16개국 그림책 작가 워크숍’에 안정언 교수가 나를 추천했다고. 그렇게 일본에 갔고 그 과정에서 <백두산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고, <노란 우산>도 구상하게 됐다.
워크숍 이야기 좀 더 해달라.
1984년은 자유 여행을 할 수 없어 초청장을 받아야 여권을 만들 수 있던 때였다. 비행기도 외국도 처음인 데다 한국대표로 참석한 워크숍에선 내내 그림책에 관해 이야기한다니 그때의 설레고 떨리는 마음이 어땠겠나. 3주 동안 아시아 16개국 그림책 작가들이 모인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무얼 하는지도 잘 몰랐는데 그저 좋았다. 가서 보니 세미나도 열리고 작가들이 모여 그림책의 비전도 이야기하고 새로운 그림책을 직접 그리기도하며 시간을 보내더라. 그곳에서 ‘종이의 신’이라 불리는 일본 출판계 거물 마쓰이 다다시와 그림책 <뛰어라 메뚜기>의 작가 다시마 세이조를 만났고 지금까지 교류하며 지내고 있다. 어찌 보면 짧은 3주의 시간이지만 그곳에서 나는 사람을 얻었고, 우리 그림책이 얼마 낙후되어 있는지 깨달았고, 작가는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 알게 됐으며, 돌아가서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 후 첫 책 <백두산 이야기>가 나왔나보다.
사회 시간에 배우지 않나 전체 국토 중 70%가 산이라고. 그런데 일본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그냥 나라 전체가 다 산 같더라. 왜 우리나라엔 산이 많을까? 산이 많아 좋은 건 없나? 생각하다 ‘산, 산, 산’ 이란 제목으로 구상을 시작했다. 그 후 자료를 조사하며 조금씩 변화한 끝에 <백두산 이야기>가 만들어진 거지. 숙명에서 교사 생활할 때였는데 3층 미술실에 넥타이 7개 가져다 두고 그곳에서 먹고 자고, 잠깐의 짬만 있어도 들락거리며 4년 반이란 공을 들여 완성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옛날얘기다.
<백두산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류재수의 역작이자 그림책의 새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출판 후 당시의 분위기는 어땠나?
국내에선 판형이 크다, 그림이 어둡다, 내용이 어렵다 등등 욕 무지하게 먹었다. 그때 마쓰이 다다시가 힘이 됐지…. ‘이 책 때문에 앞으로 일본 그림책이 한국을 앞섰단 말을 할 수가 없다’ 라며 자신이 강의하는 여섯 개 대학의 교재로 사용해줬다. 일본에서 <산이 된 거인>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소소하지만, 꾸준히 살 사람이 사 가고 있다더라.
그 후 나온 <노란 우산>은 국내외 독자들과 평론가 모두에게서 주목받고 좋은 평을 받은 것으로 안다.
‘뉴욕타임스 올해의 우수 그림책 10’으로 선정된 걸 많이들 기억하더라. 하지만 내게 더 의미 있었던 건 국제 어린이 도서 협의회(IBBY)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선정한 ‘세계의 우수 어린이 책 40권’에 이 책이 뽑혔다는 것이다. 게다가 50주년 기념 팸플릿 표지로 <노란 우산>이 실렸으니 영광 중 영광이지. 한데 그보다 더 기뻤던 건 선정 이유였다. 글자도 특별한 줄거리도 없이 오로지 시각적 이미지의 즐거움을 표현했다는 그 말. 그게 바로 내가 <노란 우산>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거든. 온전히 이해받은 기쁨이 상당했다. 그 후 영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어 심지어 아랍어 버전으로까지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으니 그림책 그렌드 슬램은 이뤘구나 농담하곤 한다.
그런데 1884년 워크숍 때 구상했다 하신 책의 출판이 2001년이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원래 <백두산 이야기>보다도 먼저 틀을 잡았었다. 워크숍 과제로 그리고 싶은 걸 그려내라 하셨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숙제를 못 했으니 워크숍에 가지도 못하고 호텔 창 아래로 비 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한국의 초등학생들도 이렇게 우산 쓰고 등교하겠구나’ 생각이 들더니 순식간에 7컷이 생각났다. 청소 아주머니 쓰시는 양동이 빌려 물방울을 떨어뜨려가며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시작은 그랬는데 진행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십오 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사건, 교훈 그리고 글자조차 없이 오로지 시각적 이미지만을 표현하자 생각했다. 좋은 테마다 제대로 해보자 각오는 단단히 했는데 그걸 표현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내 능력이 그만큼이 안됐던 거지. 차갑지도 탁하지도 않은 딱 맞는 미묘한 회색 바탕을 찾기 위해 40~50장 그려 겨우 한 장 건지는 식이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트레이싱지 무지 써가며 치밀하게 계산해 그렸다. 빗방울이 퍼지는 동그라미의 모양을 많이도 넣어보고 덜어내 보기도 하고, 우산의 크기도 조절하고, 컬러 배치도 다르게 바꿔가며 변화를 줘보고, 배경도 그렸다 뺐다 바꿔보고 순서도 왔다 갔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장면 하나하나, 붓 터치 하나하나 고심했다. 그런데도 최종본 만든 후에도 다섯 번이나 고치고서야 겨우 출판할 수 있었다. 말을 걸고 시선을 빼앗아가는 요소들을 덜어내는 거, 빼는 작업이 정말 어렵더라.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는 이유는 뭔가?
흥미로우니까. 내가 원하고, 내가 즐겁지 않으면 절대 안 하는 성격이다. 재밌으니까, 좋으니까, 흥미로우니까 한 거지.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 게다가 나에겐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걸 담을 최고의 그릇은 여전히 그림책이고. 가장 먼저, 뿔뿔이 흩어진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역사에 희생되어 강제로 이주한 낯선 땅이지만 그곳에서 뿌리내리고 잘 살아나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과 그 후손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꼭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