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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로 살기로 했다
선인장 이파리는 사막이란 극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가시가 되었단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뜨거운 햇볕, 밤에 찾아오는 추위, 부족한 수분 그리고 해를 입히는 초식동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주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뾰족한 가시가 된 것이다. 그도 그렇다. 현실이란 무게에 눌려 무뎌지고 무던해지다 결국 자신을 잃을까, 애써 날카롭게 가시가 되길 선택한 까시(ccasi)란 이름의 작가.
그의 작업실은 흡사 동굴 같다. 길가로 나 있는 커다란 통창은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고 간접 조명 서너 개가 어둠을 겨우 몰아낼 뿐이다. 좋아하는 책, 직접 원두를 볶아 내릴 수 있는 꽤 괜찮은 커피 머신, 달리기할 때 신을 운동화 두 켤레, 그리고 유유히 공간을 유영하듯 떠 있는 모빌들과 그의 작업물들, 밖의 것과는 단절된 그만의 세계가 조용히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처음 1층 작업실을 얻을 때만 해도 주변과 소통하며 소소히 작품도 알릴 수 있진 않을까 내심 생각했었다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 못됐단다. 사회인으로 영 부족하고 관계를 잘하지 못하는 데다 나눠줄 에너지도 없어 그렇다는데 오히려 내겐 엄청난 에너지를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쏟아붓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현실적인 경제적 문제나 맏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평범한 사회인으로의 삶에 대한 적당한 타협 대신 나에게만 더욱 집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처럼도 보였다.
실제적으로도 본인이 좋아하는 걸 찾는데 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는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는 그. 상대적 우위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어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통은 포기하고 마는 ‘절대의 만족’을 찾아 스스로 험한 길 가는 순례자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뎌지지 않으려 매일 같이 자신을 뾰족하게 깎아내는 고행도 마다치 않는…
생각보다 작업 스타일이 다양해 보인다
최근에 한 나뭇가지 작업만 보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그건 원래 내 스타일은 아니다. 방황하던 내 모습, 내 시간이 아주 우연히 그런 작업물로 나타났을 뿐이다. 나는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패턴을 활용한 감각적인 작업을 좋아한다. 소재도 아크릴이나, 얇은 금속 등 보다 모던한 느낌이 나는 것들을 선호하는 것 같고. 최근에는 정말 작정하고 달려들고 싶은 작업을 시작했다. 가구처럼 보이지 않지만, 가구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만들려고 한다. 일단 이미지 작업만 해서 한쪽 벽에 붙여놓았는데 점점 입체적인 작업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엔 또 내가 어디로 갈지 잘 모르겠다. 나무뿌리가 물 찾아 막 뻗어가듯 나도 아직 내가 좋아하는 것 찾아 사방으로 확장 중인 것 같다. 좋아하는 스타일은 있지만 그게 확정된 것도 아니고, 나도 내가 앞으로 무얼 할지는 나도 정말 잘 모르겠다.
방황의 시간이 길었나 보다. 생각보다 나무 작업물이 많다.
완전 바닥이었다. 완전 맥없이 있었다. 복잡한 생각과 불안하던 걸음으로 산책하던 중 발견한 아이들이다. 그냥 예뻐 보여서 되는대로 주워왔다. 처음엔 그냥 꽂았는데 한참 두고 보다 보니 색도 한 번 입혀 보고 싶고 그렇게 또 한참 시간을 보낸 후에 다시 보니 실로 연결해 도형화해보면 재밌겠다 싶기도 하더라.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했다기보다 정말 우연히 건진 작업물들이다. 힘 빼고 하는 복잡한 생각을 없애주는데 나무를 깎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도구도 아주 흔한 커터 칼이면 족하다.
처음 작업은 어떤 거였나?
알랭 드 보통이 쓴 ‘행복의 건축’을 재밌게 읽었다. 그 속에 있던 이슬람의 기하학 패턴이 마음에 꽂히더라. 필사해 옮기면 간단하겠다 싶었는데 웬걸 구조 알아내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게 한 6개월을 빠져 만들었던 게 바로 첫 작업이었다. 컬러도 소재도 가벼운 걸 선택해, 패턴을 이용한 포스터도 만들고, 목걸이랑 마그네틱, 모빌도 만들었다. 그게 딱 4년 전이다.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디자인 전공 후 디자인 회사에도 있었고 조명회사에도 게임 회사에도 있었다. 디자인 전공은 여러 분야에서 다 필요로 하는 데다 컴퓨터를 잘 다루다 보니 취직은 쉽더라. 하지만 직장인 체질이 아니었던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아 맞는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헤맸다. 제빵을 배워 카페도 차려봤고 만화방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뭘 만들고 있는 거다. 내 것 만들고 싶은 욕심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돌고 돌다 결국 멀리 가지 못하고 도로 그 지점에 있더라. 다른 거 다 생각하지 말자. 안되면 언제든 그만두자 마음먹고 까시(ccasi)란 이름의 작가로 살게 되었다.
변화무쌍하다.
어머님이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라 하셨는데, 이기적인지 몰라도 난 나의 흥미,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좋아하는 건 해보고야 마는 행동파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손해도 많이 봤다. 손익계산도 잘 못 하는 데다 오로지 내 타이밍에만 맞춰 움직이다 보니… 그러고 보니 주거 지역도 홍대에서 남원, 해방촌 등 여기저기 많이도 옮겨 다녔다. 하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다. 한 이년 정원이 있는 남원의 한옥에 살았는데 그 지역이 목기로 유명하더라. 좋은 선생님께 목공 작업을 배웠다. 정말 나무를 기가 막히게 만지신다. 요가, 달리기, 만화책, 커피…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잘하고 싶어 하다 보니 어디로 튈지 모르게 살았나 보다. 앞으로 10년은 더 떠돌고 방황하려고 계획 중이다.
까시란 이름은 가시를 뜻하는 건가?
그렇다. 선인장 가시를 뜻한다. 게임 회사 다닐 때 닉네임인데 그땐 내가 한참 선인장에 빠져 있을 때라 서로 본명도 모르고 위아래도 따로 없이 아주 자유롭게 닉네임을 불렀었다. 출퇴근도 자유롭고 사람들 사고방식도 다양하고, 상사와 부하 구별 없이 평등하고 그때의 기억도 좋고 나에게도 맞는 것 같아 그대로 쓰고 있다.
작업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오래도록 머릿속에 담아둔다. 그렇게 떠오른 생각들은 그때그때 수첩에 적어놓고 이미지도 그려보고 연관된 단어들도 노트해 놓곤 한다. 그다음 이 막연한 생각들을 스케치해 이미지화하고 컴퓨터로 옮겨 작업한다. 기계를 이용해 더욱 정확도 있게 완성해 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보통 포스터처럼 만들고 그 후 입체화시키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숙성’ 과정이다. 만들어 놓고 시간을 들여 한참 두고 보면 추가해야 할 부분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보이고 처음엔 별로였던 게 괜찮게 느껴지기도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재나 느낌은 변해도 모빌 사랑은 한결같아 보인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그 느낌이 좋다. 공기 속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느낌도 들고. 첫 작업 때는 도형적으로 접근했다면 나무로 작업했을 때는 귀여운 종달새와 논다는 맘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데 그럴 때면 꼬리가 팽그르르 돌아간다.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
뭔가 발견하고 그 속으로 들어갈 때 느껴지는 ‘그 느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 속에서 나는 위로와 에너지를 받는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뭐든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돋보이고 그 느낌이 좋은 것처럼 나 역시 이 작업실에 있을 때 그게 진짜 나인 것 같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바램보다 그저 경제적인 어려움을 잘 풀어가며 계속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요새 작업과 전혀 관계없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인데 한계치가 와서 후임자가 정해지면 곧 그만두기로 했다. 돈을 크게 벌기보다 먹고살고 작업할 수 있을 만큼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