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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누아르
밝은 빛이 사그라들고 밤이 되면 달의 기운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 해와는 상극이다. 밤의 시간을 영위하며 완성한 작품들은 그 시간을 닮아 어둡고 무겁다. 한껏 치켜 올라간 눈썹에 빨간 눈을 한 복면의 남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무기들, 내리누르는 시커먼 하늘, 위태롭게 서 있는 검은 망토의 사람. 그렇게 폭력과 어둠, 잘못된 욕망을 담은 조금 불편하고 불안한 작업을 한다. 형식은 약간씩 달랐지만 한 번도 딴 길로 새지 않고 어릴 적부터 지금껏 죽 그렇게 VSFORCE란 이름으로.
작가는 실험적이어야지 상업화되면 안 된다 생각했다. 가난을 등에 업고 사는 한이 있어도 후회 없다. 실패작이라도 안 팔고 싶다며 상업화를 하대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상업성의 반대 지점에 놓인 아방가르드 한 그림을 그리는 데다 반사회적인 성격까지 띠니 그림으로 돈 벌 일은 애초에 없겠다 싶기도 했고. 그러다 한 이년 전 즈음부터 변화가 생겼다. 이런 나를 잘 아는 어릴 적 친구가 딜러가 되며 설득하기 시작했고, 수긍되는 부분이 있어 그 뜻에 따라 적게나마 판매의 맛을 봤다. 물론 작업으로만 먹고 살길은 여전히 소원해 보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생계수단으로서의 직업인 일러스트레이터, 포토그래퍼, 디자이너의 박병호와 예술가의 삶을 사는 VSFORCE가 시행착오 끝에 이젠 균형을 이루어, 원하는 바대로 최소한의 시간을 써서 딱 먹고 살 만큼 벌고, 그 대신 충분한 작업 시간을 확보하게 됐다. 또, 오랜 무도의 수련을 통해 몸은 물론 마음의 단련을 이뤄 누군가 봤으면 힘들었을 수도 있는 삶 속에서도 부동심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것도 다행이고. 게다가 오차 없이 완벽한 덕업 일치로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으니 꾸준히 아카이빙 하며 정진하는 것만 남았다. 어둡고 거칠어 때론 외면하고 싶을지라도 환하고 예쁘게 꾸민 억지 행복을 말하지 않는 진짜 나의 작업을.
강렬한 작품과 이름 때문에 긴장하고 왔는데, 상상했던 것보다는 인상이 부드러워 보여 다행이다.
예전 격투기 했을 때 만났더라면 좀 달랐을 거다. 지금 수련하는 게 아이키도(Aikido)인데 이 무도의 철학이 ‘나를 베러 오는 적을 친구로 만든다.’이다. 보통의 무도는 대련할 때 서로 긴장하고 팽팽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건 그렇지가 않다. 힘 빼고 웃고 화내지 않고. 제압할 힘은 있지만 살살 달래가며 싸울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종 목적. 아이키도를 통해 무언가를 바로 맞닥뜨리지 않고 돌아가는 유연함을 익히는 중이다. 배려의 무도, 착한 무술이라 불리는데 그런 정신으로 수련을 하니 그게 인상에도 나타나는 것 같더라.
작업할 때 쓰는 닉네임 VSFORCE도 무도를 통해 얻는 힘과 관계있는 건가?
직관적인 이미지 그대로 어떤 힘과의 대결 구도인 Versus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원뜻은 아니지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재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화 그리며 썼던 이름인데 사회 시스템의 희생양으로 기계처럼 흘러가는 안타까운 인생들을 모두 똑같은 얼굴의 캐릭터로 그리고 Victim Spirit이라 이름 붙였다. VS(Victim Spirit)에 힘(Force)을 합쳐 VSFORCE(브이에스포스)가 된 거다. 간혹 개인이 아니라 디자인 크루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더라.
고등학교 때부터 작가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나?
지금도 그렇지만 뭔가 해야지 하고 계획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운명론자라서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하게 되더라’를 믿는다. 내 앞에 있는 동기들을 좇아 그때그때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왔더니 어느새 작가가 되어있었다. 미술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는 것이 낯설지 않은 환경이었고 그런 이유로 유치원 때부터 만화 그릴 만큼 놀이처럼 취미처럼 그림을 그렸고, 그런 계기로 대학도 자연스럽게 디자인 대를 들어가게 됐다. 군대 다녀와서 그래피티 하다 중퇴하긴 했지만...
그라피티를 했었다고?
그래피티가 근래 들어 공공미술과 결합하며 반항하는 안티 소사이어티의 느낌이 줄고 현대 디자인의 한 소스처럼 되긴 했지만 처음 그래피티를 했을 때만 해도 불법 행위를 통해 어택(Attack)하는 느낌이 강했다. 힙합 좋아하고 거친 것 좋아하니 자연스레 스트리트 아트를 하게 됐고 운명처럼 들어간 전차부대에서의 군 시절을 통해 다른 아티스트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기법을 찾게 됐다. 가끔 전차에 도색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때 일련번호를 입히는 방법이 바로 스텐실이었던 것. 전역후 스텐실 기법으로 작업을 하다가 아티스트 뱅크시를 비롯해 여러 아티스트들을 알게되었고 점점 더 매력을 느껴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파내는 준비 작업은 오래 걸리지만, 현장에서는 짧은 시간에 그림을 완성하고 잡힐 염려 없이 도망칠 수 있으니 더 매력적이기도 했고, ‘저기다 어떻게 그렸지?’ 생각하게 되는 게 동료들로부터 인정받는 포인튼데, ‘와우~’ 하는 감탄의 한마디 들으려고 가로등 위에도 올라가고 허를 찌르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남들이 못하는 걸 내가 했다는 카타르시스와 확 내질러버리는 통쾌함이 있었다.
작업의 범위가 넓은 것 같다. 사진과 무대 연출도 한 거로 아는데...
다양해 보일 수 있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래피티는 작업한 바로 다음 날이라도 소멸할 수 있으니 기록으로라도 남겨두고 싶어 사진을 하게 됐다. 필요에 의해 하게 됐는데 많이 하다 보니 배우는 것들이 생기고 잘하게 되더라. 그러다 내가 원하는 게 결국 하나의 오브제가 아니라 좀 더 큰 면을 나만의 것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구나 싶어 무대 연출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한계가 느껴졌다. 무대를 만들 공간은 늘 주어지는 게 아니니 언제 작업할 수 있을지 예측도 힘들고, 오브제들을 트럭으로 나르는 것도 힘들어지고. 가뿐히 미술 가방 하나만 딸랑 들고 전시하고 싶어 드로잉을 하게 됐다. 예전엔 큰 작업만 해서 드로잉이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요샌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콘티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작업할 수 있어서 재미를 느끼는 중이다. 끝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최근엔 설치미술을 한번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Black Spring'에 등장하는 구의 형태를 나만의 물질로 산을 뒤덮을 만큼 크게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
익숙지 않은 장르를 넘나들 때 걱정이나 떨림은 없나?
없다. 빨리 행동에 옮기고 빠져야 하는 그래피티 정신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그래서 고민하기보다 저지르고 본다. 행동력, 추진력, 결단력은 누구보다 높을 거다.
당신의 세계관이 정립된 건 그럼 그라피티 작업할 때부턴가?
그땐 오로지 스타일뿐이었다. 작업을 발전시키고 싶고 깊이를 주고 싶어 다시 미술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 나의 세계관이 정해지지 않았나 싶다. 전환점이기도 했고. 내가 원해서 한 공부라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 교수님들 쫓아다니며 못살게 굴었었다. 운 좋게도 교수님들 모두 현역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현대미술 작가분들이셔서 진짜 작업의 모습 그리고 내 것을 확립하는 기본을 닦도록 도와주셨다. 그런 과정을 거쳐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빼고 기본 뼈대만 남기니 무술과 밀리터리, 폭력이 남더라. 왜냐 물으시는데 설명을 못 하겠기에 그다음부터는 그 물음에 대한 방어 법을 세우는 데 즉 그 답을 찾는데 온 대학 시절을 다 보냈다.
그런데 정말 왜 그런 거칠고 무서운 것들에 작업이 집중되는 건가?
나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다. 내가 폭력을 선망하나? 나에게 어두운 부분이 있나?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둡고 나쁜 것으로 자꾸 터부시하며 몰아가서 그렇지 폭력성 역시 인간이 가진 여러 본능 중 하나일 뿐이지 않나.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 있는데 태아가 뱃속에서 엄마 배를 발로 차는 것도 폭력성의 한 표출이라더라. 폭력적 문화를 접해서도 아니고 배워서도 아닌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원초적인 거로 생각한다. 난 이 어두운 부분에 더 매력을 느껴 때론 직접적으로 또 때론 판타지를 더해 작업하는 거고. 그리고 밀리터리 덕후, 무도 덕후로의 내 모습은 가정의 영향이 크다. 경험이 작업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내가 가진 취향과 환경이 모두 서브컬처(Subculture) 적이니 그 모습이 고스란히 작업에 드러나게 되는 거고.
가정의 영향이 무얼 말하는지...
아버지가 형사셨다. 언젠가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집에 들러 식사를 하셨는데 더워서 그랬는지 외투를 벗고 계셨다. 셔츠에 권총이 담긴 홀스터를 차고 계시는데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거친 남자의 세계에 빠져버린 계기가 아닐까 싶다. 남자애들은 장난감 총, 칼만 봐도 좋아하는데 어린 나이에 나는 진짜를 가까이서 봤으니 그 강렬함이 어땠겠나. 비비건 갖고 서바이벌하며 놀고, 5학년인지 6학년 때부터는 돈 모아 플래툰 잡지 사고, 참고서 살 돈으로 무도, 무술 관련 책을 사 모으고 강한 무기와 도구, 몸을 단련하는 것에 심취해 지냈다. 지금도 작업을 위해 동시에 나의 취미 생활을 위해 밀리터리 아이템을 컬렉션 해 고이 모셔두고 있다. 누가 형사 아니랄까 아버지가 처음 보여줬던 영화도 로보캅이었을 정도니 내 취향에 있어 가정의 영향은 어마어마할 거다.
그 모든 것이 녹아든 당신의 작품 이야기를 해달라.
치트 코드(Cheat Code) 시리즈, 그다음 유토피아(Utopia) 그리고 블랙 스프링(Black Spring)으로 이어진다. 그때그때 영향을 주는 것 중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며 유연히 변해가고 있다. 조금씩 달라지는 생각에 휘어지기도 하지만 방향은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시리즈 전체를 아우르는 건 인간에 대한 이야기. 치트 코드 때는 힘의 크기와 그걸 다루는 사람의 문제였고 유토피아 때는 힘을 가진 인간이 욕망으로 붕괴하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반어적인 제목에 담았고 최근작, 블랙 스프링은 능력을 가늠할 수 없는 둥그런 모양의 구(球)가 새로운 심판자로 등장한다. 크게 보면 처음에 공격과 방어를 하던 단체가 점점 없어지다 끝내 소멸하고 원형의 존재 B가 나타난 것. 그 구가 어떤 물질인지 어떤 힘이 있는지 아직은 나도 모른다. 시리즈를 이어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 조금 바뀐 건 그림의 스타일이다. 강렬했던 붉은 기가 줄어들고 단순화되고 추상화되고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보고 예전보다 평화롭다 느낄 수 있겠지만 커다란 태풍이 몰려오기 전, 고요 상태의 불안정한 느낌이라 보면 될 것 같다.
드로잉 작업할 때 어떤 재료를 사용하나?
먹을 사용한다. 동양적인 색채를 좋아하기도 하고, 다루기도 쉽고 가성비도 좋아서. 500mL에 이천 원. 그거면 100장 이상 그릴 수 있으니 재료비 걱정 없이 작업할 수 있다. 시간이 다 드러나는 재료라, 머뭇거리거나 살짝 수정하면 그대로 티가 나서 한 번에 빠르게 작업해야 하는데 그런 현재의 순간성이 재밌다. 그래피티 하며 빠름을 추구했던 내 성격에도 잘 맞고. 어려운 건 마지막 20초. 동양화엔 하지 않는 바니시 처리를 꼭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뭉개지거나 다 밀려서 작업을 망치기 일쑤. 하지만 제대로 완성되면 먹그림이지만 동양화는 아닌, 독특한 유화 같기도 한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
작업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나?
천재가 아니고선 아카이빙 없이 작품이 나온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소한 생각이라도 아이디어 노트에 적어서 남겨두려 하는 편이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들, 사소한 이미지 같은 것도 기록하고. 전시했던 것, 작업했던 것도 차곡차곡 잘 모아두고. 그림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수련하고 아카이빙 하는 내 라이프 자체가 모두 작업이라 생각한다.